리눅스든, 윈도우 NT 서버든
새로 설치만 하면 습관처럼 하던 일이 하나 있었다.
ping -t www.naver.com
(핑이 안되네요
언제부터 네이버 ping 이 안되었나요?)
그게 꼭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서버가 제대로 살아 있는지” 확인하는 의식 같은 행동이었다.
당시에는
164.124.101.1
168.126.63.1
을
못 외웠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네이버라는 이름을 처음 제대로 인식한 것도
바로 그 ping 테스트 덕분이었는지 모른다.
선배가 늘 그렇게 했고,
나는 이유도 모른 채 그대로 따라 했다.
그 시절 정보 검색의 중심은 포털이 아니었다.
기술 자료를 찾을 때는
- 유니텔
- KLPD
- PHP스쿨
이런 곳을 훨씬 더 자주 들여다봤던 기억이 난다.
특히 PHP스쿨은
‘노하우를 공유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선배 한 분이 말하던 표현 그대로라면
“노하우가 아니라 노웨어(No-Where)”
어디에도 없는 정보들이
사람들 손을 거치며 쌓여 있던 공간이었다.
정제되지 않았고,
가끔은 틀리기도 했지만,
그래서 더 살아 있는 지식 같았다.
지금처럼 검색 한 번이면
답이 바로 나오는 시대와는 달랐다.
그땐
- 누군가 남긴 글을 끝까지 읽고
- 댓글을 따라가고
- 게시판 날짜를 거슬러 올라가며
‘배운다’기보다는 ‘헤맨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하지만 그 헤매는 과정 덕분에
기술이 남았고,
사람이 기억에 남았다.
지금 다시 떠올려보면,
그 시절 인터넷은
빠르지도, 친절하지도 않았지만
분명히 손맛이 있었다.
서버 하나 세팅하고
ping 한 줄 날리며
“됐다”라고 말하던 그 순간까지도.
1999년 네이버 메인

2000년 3월 네이버2000년대 초반 포털을 다시 보다
화면을 보자마자 네이버 시그니처 색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지금의 네이버와는 다르지만, 묘하게 연결되는 분위기가 있다.
검색창을 자세히 보니 디렉토리 구조가 보인다.
이걸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당시 검색은 지금처럼 크롤링 중심이 아니라,
서버에 공개된 디렉토리를 직접 인덱싱하던 방식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게intitle:index.of hwp 같은 검색이다.
누군가 서버에 올려둔 파일 목록이 그대로 검색 결과로 나오던 시절.
지금 기준으로 보면 보안 사고지만,
그땐 그게 인터넷의 ‘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생활 밀착형 서비스들이 눈에 띈다
zipcode — 우편번호 서비스.
지금은 당연하지만, 그땐 집 주소를 온라인에서 찾는 것 자체가 신기한 경험이었다.
무료 50메가 e-메일
메일 용량이 MB 단위로 강조되던 시절.
50MB면 “엄청 크다”라고 느꼈던 때다.
나만의 공간, myhome.naver.com/id
myhome.naver.com/아이디
이건 지금의 블로그나 SNS 이전,
개인 홈페이지 시대를 상징하는 서비스였다.
배경 음악 깔고,
방명록 달고,
프로필 이미지 하나 바꾸는 데도 하루가 걸리던 시절.
야후코리아와 쥬니어네이버
야후코리아 하면 ‘야후꾸러기’만 떠올렸는데,
알고 보니 쥬니어네이버도 있었다.
아이들용 포털,
어른용 포털이 명확히 나뉘던 구조가 인상적이다.
지금처럼 알고리즘으로 나누는 게 아니라,
서비스 자체가 분리돼 있었다.
회원찾기 서비스
‘회원찾기’라는 메뉴가 눈에 띈다.
요즘으로 치면 연락처 동기화 이전의 SNS 같은 개념이었을까.
아이디로 사람을 찾고,
같은 학교, 같은 지역을 기준으로 연결되던 구조.
지금 생각하면 꽤 아날로그적이지만,
그만큼 사람 냄새도 있었다.
역술방 — 작명, 사주, 철학
‘역술방’이라는 메뉴도 있다.
작명, 사주, 운세, 철학 상담.
이게 단순한 재미 콘텐츠가 아니라,
실제 유료 서비스와 연결되던 초기 온라인 상담 형태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지금의 타로·운세 앱의 원형 같기도 하다.
사이트 등록, 그리고 떨어졌던 기억
사이트를 등록하려면
- 카테고리 선택
- 사이트 이름
- 콘텐츠 설명
이런 걸 직접 적어서 신청해야 했다.
나도 몇 번이나 내 사이트를 등록 신청했지만,
끝내 등록된 적은 없었다.
아마 기준이 있었겠지.
지금처럼 자동 수집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보던 시절이니까.
메일 서비스, 그리고 깨비메일
그 시절 메일 서비스도 이미 있었다.
나는 깨비메일(kebi) 을 썼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그때 네이버 메일을 썼다면,
지금도 20년 전 자료가 메일함 어딘가에 남아 있지 않았을까?
정리하며
지금의 포털은 너무 매끈하다.
하지만 그때의 포털은
- 거칠고
- 구조가 보이고
- 기술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인터넷이 아직 사람 손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던 시절.

2001년 네이버
현재 네이버랑 느낌이 많이 나네요

2004년

지식인, 메일, 카페, 블로그.
화면에 보이는 서비스들을 하나씩 보다 보니,
왜 네이버를 쓰게 됐는지 이유가 또렷해진다.
엠파스의 지식인 디스 광고도 아직 기억난다.
지식 검색을 둘러싼 포털 간 경쟁이
이렇게까지 전면에 드러났던 시절도 드물었다.
다음의 한메일 우편 종량제도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였다.
대량 메일을 보내는 곳에서는
온라인 우표를 구매해야 했고,
그 영향인지
**사이트 회원가입을 할 때
“한메일은 가입 불가”**라고 명시된 경우도 있었다.
그때 자연스럽게
👉 네이버 메일을 만들게 됐다.
커뮤니티 쪽도 비슷했다.
뉴스에서는 연일
야후를 위협하던 프리챌의 커뮤니티 유료화 이야기가 나왔고,
그 여파로
👉 네이버 카페에 가입하게 됐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이동하면,
사용자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블로그는 사실 처음엔 개념을 잘 몰랐다.
그래서 그냥
싸이월드랑 비슷한 서비스 정도로 생각했다.
개인 공간이 있고,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리는 곳.
지금처럼 ‘콘텐츠 플랫폼’이라는 인식은
그땐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네이버를 쓰게 된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 📧 메일이 필요해서
- 🧑🤝🧑 사람들이 카페로 모여서
- ✍️ 글을 쓸 공간이 있어서
이 세 가지 이유가 겹치면서
사용자 수가 늘고,
방문자가 늘고,
주변에서 쓰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결국 서비스의 완성도보다
사람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 결과였던 셈이다.
2011년 네이버

스티브 잡스의 스마트폰 보급 이후,
아마 2009년 전후부터 접속자 수는 눈에 띄게 늘었을 것이다.
화면을 보니 모바일 페이지도 보인다.
이때부터 인터넷은
PC를 켜서 들어가는 공간이 아니라,
손에 들고 다니는 공간이 됐던 것 같다.
솔직히 잡스 형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레시피 하나 검색하려고
PC부터 켜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책장에서
「남편을 기쁘게 하는 30가지 요리」
같은 책을 꺼내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변화의 크기를 생각하면
다시 한 번 위대함에 감사드릴 수밖에 없다.
비록 나는
애플 제품을 하나도 쓰지 않지만,
영향만큼은 확실히 받고 있다.
혹시 다시 태어나신다면,
- 🎩 모자에 액정 달린 PC 하나 만들어 주시고
- 🤖 환각 없는 AI도 하나 심어 주시면
정말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