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를

박영수는 태어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를 잃었다.
말 그대로 젖내가 가시기도 전이었다.
그 시절엔 여자가 혼자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할 곳도, 아이를 맡길 곳도 없었다.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모성은 늘 마지막으로 밀렸다.

유옥분은 결국 결단을 내렸다.
갓난아기였던 영수를 박성호와 그의 아내 최순덕에게 양자로 맡겼다.
작은아버지 댁이었다.
아이를 버린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말을,
그때의 옥분은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큰딸 박정희의 손을 잡고 다시 시집을 갔다.
상대는 김만석이었다.
글을 몰랐지만 손은 부지런했고, 말수는 적었지만 하루도 허투루 살지 않는 사람이었다.
호성읍에서 정육점을 하며 살았다.
새벽이면 도마 소리가 먼저 났고,
저녁이면 고기 냄새가 골목에 남았다.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밥 걱정은 없었다.
아이들 입에 굶주림이 닿지 않게 할 정도의 삶이었다.
그 시절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사는 편이었다.

문제는 ‘글’이었다.
만석은 숫자를 읽지 못했다.
사람을 믿었고, 종이를 믿었다.
돈을 빌려달라는 이웃들에게 차용증을 받았지만
그 종이 위에는 그가 빌려준 금액과 전혀 다른 숫자가 적혀 있었다.
십만 원이 백만 원이 되고,
백만 원이 몇 배로 불어 있었다.

속았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돈보다 더 무서운 건 억울함이었다.
분노를 밖으로 풀지 못한 사람의 화는 안으로 쌓였다.
그 화는 결국 병이 되었고,
1970년 즈음, 만석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홧병이라고 했다.

한편, 박영수는 자랐다.
양부모의 사랑 속에서 컸지만
친어머니가 어디에 사는지는 알고 있었다.
호성읍 근처였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그 근처였다.

학교를 오가며 그는 자주 그 동네를 지났다.
일부러 멀리 돌아가지도 않았다.
그 집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다 돌아서기도 했고,
어느 날은 문을 열고 들어가 어머니를 불러보기도 했다.

“왜 나를 버리고 갔어.”

그 말은 따지듯 나오기도 했고,
울음과 함께 쏟아지기도 했다.
옥분은 그럴 때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설명할 수 없는 시대였고,
설명해도 이해받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김만석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
핏줄도 아니고, 법적으로도 아들이 아닌 아이였다.
하지만 그는 영수를 외면하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꽤 비싼 자전거도 사주었다.
괜히 더 잘해주었다.
아이의 눈에 맺힌 서러움을,
자신이 대신 덜어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 모습을 가장 힘들게 바라본 사람은 최순덕이었다.
남의 아이를 데려와 키운 것도 모자라
친엄마 집을 들락거리며 울고불고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그녀에게 너무 가혹했다.

“그럴 거면 네 엄마한테 가.”

화가 나서 내뱉은 말이었다.
아이를 미워해서라기보다
상처가 쌓여 나온 말이었다.
그 말에 또 누군가는 다쳤고,
그렇게 이 집 저 집의 마음이 모두 조금씩 닳아갔다.

그 시절의 가족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아서 아팠던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선택한 일들이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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